백익의 후예 나주나씨
시조 나부(羅富)는 원래 중국 예장(豫章)사람으로 우리나라에 건너와 나주(羅州)에 정착,
고려조에 벼슬하여 정의대부감문위상장군(正義大夫監門衛上將軍) 지냈습니다.
그러나 시조 나부가 동래한 연대와 정착한 지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었습니다.
1982년에 간행한 <나주나씨대동보(羅州羅氏大同譜)>에 의하면 옛 가승 및 고려 말의
공조전서 진(璡)의 묘비문에 <당(唐)나라 태종 때 한림수찬관이 해외로 귀양가던 도중
풍랑을 만나 발라(發羅:나주의 옛이름)에 표착하여 본관을 나주로 하였다>고 씌어 있고,
용강(龍岡), 강화(江華), 수원(水原)에 있는 옛 문적에는 <시조 부(富)가 봉명(奉命)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체류중 송(宋)나라가 망하자 여황에 정착하면서 본관을 나주로
하였다>라고 씌어 있어 시조의 동래 연대와 정착지점이 각 지역 또는 각 파간에 일치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1975년에 주한중화민국 대사 나영덕(羅英德)이 제시한
<예장나씨광동파보(豫章羅氏廣東派譜)>에 의하면 나영덕 대사의 25대조인
금상(錦裳)에게 두아들이 있었는데 장자 부(富)는 이름자만 씌어 있었고,
차자 귀(貴)는 송나라 소흥(紹興:1131~1162)연간에 황비의 난을 피해 남웅(南雄)으로
옮겨와 광동파 파조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시조 부가 사신으로 왔다가 송나라가 망하자 돌아가지 못했다는
연대(1127년)와 귀가 남쪽으로 옮겼다는 소흥 연간이 비슷한 연대이고 또 양측의
정황이나 당시의 사정으로 미루어 보아 광동파보에 나오는 부와 나주나씨 시조부가
동일인이라는 의론이 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부 이하 세계가 실전되어 계대가 가능한
나득규를 제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습니다.
시조의 제단은 전남 나주군 나주읍 송월리에 있으며 매년 3월 15일에 향사합니다.
성원(姓原)-임진보참조(壬辰譜參照)
나씨(羅氏)는 멀리 백익(伯益)의 후예(後裔)로서 대대(代代)로 우(虞)나라에 사관(仕官)
하다가 주대(周代)에 이르러 대나씨(大羅氏)가 되어 성왕(成王)을 섬겨 유공(有功)
하였기로 나국(羅國)을 봉(封)하였더니 초(楚)나라 부용국(附庸國)(이곳은 박나상(泊羅上)에
있다)되었다.
후(後)에 초(楚)나라 굴씨(屈氏)에게 멸(滅)함바 되어 예장 나씨(豫章羅氏)가 되었다.
(안(按)컨데 지지(地誌)에 예장(豫章)은 금중국강서성남창부(今中國江西省南昌府)에 있으며
굴씨(屈氏)의 사적(事蹟)은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상재(詳載)되어있다.
중국나씨족보예장나씨전기(中國羅氏族譜豫章羅氏傳記)
시조(始祖)는 황재헌원씨(黃宰軒轅氏)요. 자(子)에 소호김천씨(少昊金天氏)요. 자(자)에
전욱고양씨(○頊高陽氏)요. 자(子)에 축융씨(祝融氏)로부터 62세(六十二世)를 전(傳)하여
광정공(匡正公)이 주(周)나라에 유공(有公)하였음으로 나국(羅國)(금방주(今房州))에
봉(封)하여 대나씨(大羅氏)가 되었다.
우전 90세(又傳 九十世)에 학공(學公)이 나라를 ○탄당(○呑當)하고 도피(逃避)하니
자못 일인(一人)이 존재(存在)하여 전지백령2세(傳至百零二世)에 주공(珠公)이 한(漢)나라
초(初)에 대공(大功)이 유(有)하였음으로 예장군(豫章郡)(금남창부(今南昌府))을 봉(封)하였다.
이에 예장나씨(豫章羅氏)가 되었습니다. 주공(珠公)으로부터 29세(二十九世)를 전(傳)하여
굉보공(굉보공)에 지(至)하여 골출국(骨出國)(일운골견국(一云骨見國))으로 천왕(遷往)하였다.
기후(其後)로 33세(三十三世)에 유일인공(有一寅公)하야 생오자(生五子)하니
개귀현(皆貴顯)하였다.
이때는 당말시인(唐末時人)이니 황소지란(黃巢之亂)으로 분산각처(分散各處)하였으니
중국지나(中國之羅)는 개일본야(皆一本也)라 하였다.
이조성원잡기(李朝姓原雜記)
나씨(羅氏)는 중국예장(中國豫章)으로부터 동도(東渡)하여 유휘부(有諱富)하야
고려정의대부감문위상장군(高麗正議大夫監門衛上將軍)으로 위시조(爲始祖)하고
위관나주(爲貫羅州)라 하였다.
구승(舊乘) 및 고려말공증전서공휘진묘비문중(高麗末工曾典書公諱璡墓碑文中)
당태종조(唐太宗朝)에 한림수○관(翰林修○官)이 해외(海外)로 원○중(遠○中)에
풍랑(風浪)으로 표류(漂流)하여 발나현(發羅縣)(금나주(今羅州))에 상륙급거(上陸伋居)
하고 위관나주(爲貫羅州)라 하였다.
나주는 본래 백제의 발나현 인데 신라때 금산군으로 고쳤다.견훤이 후백제라 칭하고
이 땅을 모두 차지했으나 궁예가 빼앗아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조 성종 14년에
절도사를 두었고 진해군이라 칭하여 해양도에 소속시켰다.
현종 9년에 목으로 승격시켰으며 조선 조 세조 때는 진을 두었으며 1894년 나주부가 되어
관찰사가 주재하였고 1895년 행정구역이 바뀜에 따라 1군으로 전라남도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주요 성씨로는 나. 양. 오. 정. 임. 박. 홍. 류씨 등이 있다.
나주 나씨의 파로는 전서공파(典書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금양군파(錦陽君派), 연안군파(延安君派), 직장공파(直長公派)가 있습니다.
나주나씨 분파는
고려조에 진사를 지낸 4세조 나수영(守永)의 다섯 아들을 파조로 하여 나누어지는데
나위(位)의 후손이 전서공파, 나계(桂)의 후손이 시랑공파, 나석(碩)의 후손이 금양군파,
나세(世)의 후손이 연안군파, 나원(源)의 후손이 직장공파 입니다.
전서공파(典書公派)의 파조인 위(位)는 고려 때 일찍 출사(出仕)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호조 전서(戶曹典書)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당시 혼란한 정국을 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나주에
은거자정(隱居自靖)하여 금양처사(錦陽處士)로 불리였으며, 그의 아들 동길(東吉)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지내고 증주 목사(甑州牧使)로 나가 자손들이 그곳에서 잉거(仍居)하면서
용강(龍岡)과 성주(成州) 등지로 이거(移居)하여 주로 관서북 (關西北) 지방에 집중 세거하게
되면서부터 전서공파(典書公派)의 일족(一族)을 이루었습니다.
시랑공파(侍郞公派)의 파조인 계(桂)는 고려에서 벼슬이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이르렀고,
자손들이 주로 경기도(京畿道)에 집중 세거하며 시랑공파(侍郞公派)를 이루었다.
그의 묘소(墓所)가 한양성내(漢陽城內)에 있는 것으로 기록에 전하나 실전(失傳)하여
1978년 후손들이 강화군 (江華郡) 하점면(河岾面) 장정리(長井里) 봉천산(奉天山) 남쪽에 6대를
설단(設壇)하고 매년 음력 10월 13일에 향사 (享祀)하고 있습니다.
금양군파(錦陽君派) 파조(派祖)인 석(碩)은 고려 때 사온서 직장(司 署直長)으로
나라에 공(功)을 세워 금양군(錦陽君)에 봉해졌으며 학문(學問)이 뛰어났고,
나주로부터 김제(金堤)로 이거(移居)하여 자손들이 김제파(金堤派)라고도 하였습니다.
그의 묘소(墓所)는 김제의 북조산(北造山)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후손들이 1954년
김제군(金堤郡) 금산면(金山面) 청도리(淸道里) 종산(宗山)에 설단하고
매년 음력 3월 15일 향사(享祀)하고 있습니다.
연안군파(延安君派) 파조인 세(世)는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고
전라도 상원수(全羅道上元帥) 겸 도안무사(都按撫使)를 거쳐 나라에 공을 세워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습니다,
묘소는 실전되어 후손들이 1957년에 충남(忠南) 서천군(舒川郡) 마서면(馬西面)
옥산리(玉山里) 순제동(荀堤洞)에 설단하고 매년 음력 3월 17일에 향사하고 있습니다
직장공파(直長公派) 파조인 원(源)은 사온서 직장(司 署直長)을 지내고
나주(羅州)에 세거(世居)하고직장공파(直長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고,
묘소는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던 아들 진(璡)과 함께 나주
송현(松峴)에 있으며 3월 3일에 향사(享祀)하고 있습니다.
자료 : Dionysos-Bacchus 카페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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