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08.09 영화인 춘사 나운규 사망
1926.10.01 아리랑 개봉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51285
영화인 춘사 나운규 사망(1937-08-09)-네이버뉴스, 2004-08-09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005272
영화인 나운규 사망(1937-08-09)-네이버뉴스, 2002-08-0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8&aid=0000147711
영화 선각자 춘사 나운규 사망(1937-08-09)-네이버뉴스, 1990-12-2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3428779
영화인 나운규 타계
1937년 8월 9일은 한국 영화의 선구자 춘사(春史) 나운규가 사망한 날. 태어난 지 겨우 서른다섯 되던 해였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한 나운규는 중국 간도에서 명동(明東)중학 재학 중 3.1 운동에 참가한 이후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에 가담하는 등 30여년의 생애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쳤다.
1924년 부산의 조선키네마에 입사해 ‘운영전(雲英傳)’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처음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주연으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나운규는 1926년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 주연한 ‘아리랑’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단숨에 천재로 부각됐다.
1936년 제작한 ‘아리랑 제3편’을 제작하면서 음성녹음에 성공해 한국 영화가 유성영화시대로 전환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숨지기 전해인 1936년에 발표한 ‘오몽녀(五夢女)’까지 15편이 넘는 작품을 통해서 민족정신을 드높이고 독립에 대한 염원을 담아냈다.
이 공로가 인정되어 나운규는 1993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영화로써 민족혼을 불태운 예술가에 대한 당연한 조치였다.
/매일신문
나운규[ 羅雲奎 ]
1902. 10. 17 함북 회령~1937. 8. 9.
영화 제작자·감독·배우·시나리오 작가.
호는 춘사(春史). 일제강점기 선구적인 영화인으로, 직접 제작·감독·주연한 〈아리랑〉(1926)은 민족정신을 살린 동시에 흥행에 성공한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군인으로 있다가 한의사가 된 형권(亨權)의 3남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회령보통학교를 거쳐 1918년 간도의 명동중학교에 입학했으나 학교가 일본군의 습격으로 불타버리자 만주·연해주를 떠돌며 청년시절을 보냈다. 1916년 조정옥(曺貞玉)과 혼인하여 종익(鐘益)·신자(辛子)·봉한(奉漢)을 두었다. 연해주 일대를 돌아다닐 때는 러시아 백군의 용병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이때의 체험은 〈나의 로서아 방랑기〉에 잘 기록되어 있다. 러시아 백군에서 탈출하여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하다가 1921년 서울 중동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이 시기에 그는 어린시절 친구였던 윤봉춘(尹逢春)과 더불어 우미관을 출입하며 〈명금 名金〉·〈쾌걸 조로〉·〈철로의 백장미〉 등의 영화감상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나 북간도 시절의 도판부(圖版部)사건이 뒤늦게 문제되어 경찰에 체포된 뒤 1년 6개월의 실형을 언도받고 청진·함흥형무소에 복역했다. 감옥생활을 하던 중 독립투사 이춘성(李春成)을 만나 호(號)를 받게 되었다. 출감 이후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아버지와 둘째 형 시규(始奎)는 폐결핵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가세는 몰락한 뒤였다. 나운규는 극진히 간호했지만 그들은 세상을 뜨게 되고 이때의 간병으로 인해 폐결핵이 전염되어 1937년 사망했다.
나운규의 활동
배우가 되고 싶어했던 그는 1923년 12월 ' 예림회'라는 신극단에 입단하여 수개월 동안 북간도 일대를 돌아다녔고 뒷날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준 안종화(安鐘和)·김태진(金兌鎭)·주인규(朱仁奎) 등을 이 때 사귀게 되었다. 1924년 예림회가 자금난으로 해산되자 다시 서울로 와서 안종화의 주선으로 부산에 설립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연구생이 되었다. 윤백남 원작, 안종화 감독의 영화 〈해(海)의 비곡(悲曲)〉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뒤이어 〈신(神)의 장(粧)〉(일명 暗光)에 출연했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뒤 윤백남프로덕션이 제작한 〈심청전〉에서 심봉사 역을 하면서 배우로서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1926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제작한 〈농중조 籠中鳥〉에 복혜숙과 함께 출연했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은 당시 서울에서 요도야[淀屋]라는 모자점을 하던 일본인 여자 사업가 요도[淀]가 자본을 댄 영화사로 나운규가 영화활동을 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 〈농중조〉의 감독을 맡았던 이규설(李圭卨)은 그가 연기·각본·연출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여 많은 관심을 보였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2번째 작품으로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아리랑〉은 높은 예술성으로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나운규는 영화계의 총아로 부각되었다. 영화의 주제·구성에서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민족정서를 담아내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어 직접 각본·감독·주연하여 〈풍운아〉(1926)·〈들쥐〉(1927)·〈금붕어〉(1927)를 만들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그결과 조선키네마프로덕션과 불화가 생기게 되어 1927년 ' 나운규프로덕션'이라는 영화사를 세워 독립했다. 이 영화사의 재정 후원은 단성사 사장 박승필이 맡았고 감독 이경손, 배우 주삼손·윤봉춘·이금룡·이경선·홍개명, 촬영기사 이창용·이명우 등이 창립할 때 참여했다. 이때 〈잘 있거라〉(1927)·〈옥녀〉(1928)·〈사랑을 찾아서〉·〈사나이〉(1928)·〈벙어리 삼룡〉(1929) 등 5편을 만들어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무절제한 생활로 단원들과 불화가 잦아지고 자금난도 심해지자 〈벙어리 삼룡〉을 끝으로 '나운규프로덕션'은 해산되고 말았다. 그뒤 그는 차츰 인기가 떨어지고 카프의 영화인들과 마찰이 심해지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30년 단성사 사장 박정현(朴晶鉉)의 후원으로 '원방각사'(圓方角社)와 손잡고 〈아리랑 그후의 이야기〉를 제작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1931년 일본인 도오야마[遠山滿]가 제작한 〈금강한 金剛恨〉에 출연하여 비난을 받게 되자 더욱 어려워졌다. 이규환(李圭煥)이 감독한 〈임자 없는 나룻배〉(1932)에서 열연을 했으나 옛날의 전성기를 되찾지는 못했다. 이즈음 〈개화당이문 開化黨異聞〉·〈종로〉·〈7번통(七番通)의 소사건(小事件)〉·〈무화과〉·〈그림자〉·〈강건너 마을〉 등을 제작했으나 실패했다. 1936년 〈아리랑 3편〉을 발성영화로 만들었고 이어 이태준 원작의 〈오몽녀 五夢女〉를 완성했으나 폐결핵이 악화되어 죽었다. 현재 그가 제작한 영화의 필름은 한 편도 남아 있지 않다.
나운규에 대한 평가
나운규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원작·각색·감독·주연을 겸하여 엄청난 열정과 역량을 과시했으나 한편으로 지나친 독선에 빠지기도 했다. 그의 영화는 약자에 대한 동정, 사회에 대한 고발과 풍자를 담고 있다. 일제시대에 그가 보여준 민족정신과 예술관은 그뒤에도 많은 후진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미나도좌 '신극부'(新劇部)에서 연극을 하기도 했고 〈철도공부의 죽음〉(1930)·〈홍엽〉(1934)·〈이순신장군〉 등의 희곡을 썼다. 영화감독위원회는 1990년 그의 업적과 영화정신을 기려 '춘사 영화예술상'을 제정했고 같은 해 12월 1회 시상식을 가졌다. 문화부에서는 1991년 '연극영화의 해'를 기념하여 그를 '1월의 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네이트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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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성한 영진에게 옛 친구 현구가 방문하고 현구는 영진의 여동생 영희와 사랑에 빠진다. 악덕 지주의 마름이자 친일파인 오기호는 마을 축제의 어수선한 틈을 타 영희를 겁탈하려 하고 이를 말리던 현구와 난투극을 벌인다. 지켜보던 영진은 갑자기 환상에 빠지고 환상 끝에 낫을 휘둘러 기호를 죽인다. 붉은 피를 본 영진은 충격으로 다시 맑은 정신이 돌아오지만, 살인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끌려가는 영진의 뒤로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지며 영화는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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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이 너무나 감동이 벅차서 목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감동의 소용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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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을 하던 청년의 영화계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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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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