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공언-집-자강-계조-일손-질-사침-덕헌
나 통어사(羅統禦使) 일사장(逸事狀)
글/나천수
출처:고전번역서>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간본 아정유고(雅亭遺稿)제5권>문(文)
逸事狀이란 ‘알려지지 않은 얘기를 상부에 보고’하는 형식으로 쓰는 글이 다. 나 통어사 일사장은 조선 후기 학자·문인인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 1741~93)가 쓴 것인데, 본 일사장은 이덕무의 시문집인 아정유고에서 찾을 수 있다. 청장관고(靑莊館稿)라고도 한다
공(公)은, 휘는 덕헌(德憲)이요, 자는 헌지(憲之)요, 성은 나씨(羅氏)니, 그 선조는 예장(豫章) 사람이다. 후에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에 와 나주(羅州)에 적을 두게 되었으니, 시조는 고려 때 감문위 상장군(監門衛上將軍)을 지낸 나부(羅富)다. 전농시 정(典農寺正) 공언(公彦)에 이르러 우리 태조(太祖)를 도와 운봉(雲峯)에서 외적을 쳐 큰 승리를 거두었다. 자강(自康)은 본조(本朝)의 무안현감(務安縣監)이니 이분이 바로 공의 5대조가 된다. 자강이 계조(繼祖)를 낳았으니 장사랑(將仕郞)이요, 계조가 일손(逸孫)을 낳았으니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을 거쳐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고, 일손이 질(晊)을 낳았으니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고, 질이 사침(士忱)을 낳았으니 호는 금호(錦湖)요, 이성 현감(尼城縣監)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고,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에게 사사하였다. 중종(中宗) 때 현효(賢孝)로 포상되고, 선조(宣祖) 때 유일(遺逸)로 발탁되었으니, 사실이《삼강행실(三綱行實)》에 실렸다. 이분이 아들 여섯을 낳아 사람들이 육룡(六龍)이라 일컬었는데, 공이 맨 끝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된 광주 정씨(光州鄭氏)로 첨절제사(僉節制使) 호(虎)의 딸이다. 공이 귀(貴)하게 되자 3대의 고비(考妣)를 추증하였는데, 그 작위는 위와 같다. 공은 만력(萬曆) 원년 계유(1573, 선조 6) 6월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민첩한 생각이 남달리 깊으며, 용모가 걸특하게 빼어났다. 정여립(鄭汝立)의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금호공(錦湖公) 및 공의 세 형이 원한을 품은 자의 투서에 걸려들었는데, 공의 나이 이때 겨우 17세로 격분하여 달려가 그들을 물리치니, 모의하던 자들이 다 놀라서 도망쳤다. 금호공은 끝내 옥에 갇혔다가 선조(宣祖)의 특사로 풀려나왔고, 공만이 철원(鐵原)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말 타기와 활쏘기를 일삼았다. 병신년(1596, 선조 29)에 금호공의 상사를 당하였고, 계묘년(1603, 선조 36)에 무과(武科)에 올랐다. 문익공(文翼公) 이덕형(李德馨)이 공의 재능을 천망함으로써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가, 부안 현감(扶安縣監)으로 나갔다. 임자년(1612, 광해군 4)에 의주 판관(義州判官)에 제수되고, 갑인년(1614, 광해군 6)에 모부인(母夫人)의 상사를 당하여 그 거상을 마친 다음에, 수원부 중군(水原府中軍)을 거쳐 통정(通政)에 올랐다. 병진년(1616, 광해군 8)에 만주(滿洲)의 추장인 누르하치[奴兒哈赤]가 후금(後金)이라 참칭(僣稱)하고 우리나라를 침입해 오려 하므로, 공은 매양 분개하고 걱정하며 보장(保障)이 될 기회를 타서 스스로 그 몸을 바치려 하였다. 기미년(1619, 광해군 11)에 북도 방어사(北道防禦使)로 길주 목사(吉州牧使)를 겸임하였다가, 임기가 만료되자 선전관으로 전임되었다. 갑자년(1624, 인조 2)에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공이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을 도와 안현(鞍峴)에서 적군을 대파하였다. 공의 후부인(後夫人)은 원수(元帥)의 아내요 자매가 되는 터이라, 원수가 임금에게 아뢰어 봉작(封爵)을 더하려 하자, 공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조그마한 공로가 있다 하여 공이 포상하려 하나 필시 외인들의 말썽이 있을 것입니다. 대장부가 어찌 남의 의심을 받겠습니까?” 하므로, 다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하고 봉산 군수(鳳山郡守)를 제수하였다. 무진년(1628, 인조 6)에 안악 군수(安岳郡守)로 옮겼다가 경오년(1630, 인조 8)에 어사(御史)의 무함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때 가도 부장(椵島副將) 유흥치(劉興治)가 그 주장(主將) 진계성(陳繼盛)을 죽이고 성명(聲名)하기를,
“황조(皇朝 명(明)나라 조정을 가리킴)의 명령이 있었고 또한 그 행동이 의심할 만하였다.” 하였다. 본조(本朝)에서 이를 토벌할 의논을 하고서, 먼저 사실을 탐지하고자 그곳에 보낼 만한 사람을 선택하라고 명하였는데, 비변사(備邊司)에서 공을 들어 아뢰었다. 공이 옥중으로부터 발탁되어 형조 참의(刑曹參議)의 자격으로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가도에 들어가니, 흥치는 이미 여순(旅順)으로 이주하고 흥기(興基)와 흥패(興沛) 두 형이 서로 번갈아 가도를 지키고 있으므로 도중이 매우 흉흉하였다. 공은 편리한 대로 변에 대응하며 숨은 실정을 찾아내 계속하여 조정에 회계(回啓)하므로 곧 선천(宣川)과 철산(鐵山) 사이에 머물러서 가도의 무리를 접응하도록 명하였다. 신미년(1631, 인조 9)에 돌아와 이듬해인 임신년에 다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 계유년(1633, 인조 11)에 신사(信使)가 되어 심양(瀋陽)에 갔는데, 금(金) 나라 임금이 군사를 나열하여 에워싸고 공을 보았으나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다섯 조목의 위약(違約)을 들어 힐책하는가 하면, 그들 지역이 크고 작음과 병졸의 많고 적음과, 기계의 좋고 나쁨과 말을 먹이고 군사를 움직이는 기미를 남몰래 탐지하였다. 돌아와서는 정주 목사(定州牧使)에 임명되었다가 즉시 파직되었고, 갑술년(1634, 인조 12)에 다시 신사(信使)가 되어 심양에 갔는데, 이때 마침 ‘본국에서 명(明) 나라를 도와 금을 친다.’는 허언이 있어 금 나라에서는 온갖 수단으로 공을 욕보이며 두어 달 동안 구금하므로, 공은 일일이 들어 설명하여 사실이 아님을 밝히고, 또 그들의 정상을 비밀히 적어서 조정에 알렸다. 그러자 상이 특별히 선전관을 보내어 사실을 설명함으로써 금 나라에서 비로소 공의 귀국을 허락하게 되었다. 을해년(1635, 인조 13)에 창성 부사(昌城府使)가 되었다가 그대로 의주 부윤(義州府尹)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바뀌어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병자년(1636, 인조 14) 2월에 첨중추(僉中樞)로 다시 춘신사(春信使)가 되어 심양으로 가다가 평양(平壤)에 도착하여 금 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를 만났는데, 그는 한(汗)의 명령이라 말하면서 공에게 도로 서울에 돌아가 기다리다가 자기들의 볼일을 마친 다음에 같이 심양으로 가자고 청하였다. 이때 공이 말하기를,
“용 장군(龍將軍)이 띠고 가는 한의 명령이나 내가 띠고 가는 나라의 명령이, 그 어길 수 없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오.” 하였다. 이때 관찰사 홍명구(洪命耈)가 금 나라 사신이 대동한 서달(西㺚)의 예물(禮物)을 받지 않으므로, 금나라 사신은 더욱 화를 내며 말하기를,
“금 나라 한이 이미 원(元) 나라의 50여 왕자를 거두어, 천심과 민심이 귀속하는 바 있기 때문에 한에게 대호(大號)를 더하려 하오. 귀국은 아우가 되고 대금은 형이 되는 터이니, 형에게 경사가 있으매 아우가 이를 모르는 체할 수 없는 것이오. 지금 서달을 데리고 온 것은 이 일을 강구하려는 것이니, 귀국의 왕자제(王子弟)는 당연히 와서 하례하여야 하오.”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서달은 명 나라를 배반한 오랑캐인데 어찌 우리와 비교할 수 있겠소? 금 나라가 비록 대호를 올린들 어찌 우리나라 왕자제로 하여금 와서 하례하게 하겠소?” 하였다. 용골대는 끝내 서달과 같이 서울로 가서 한에게 존호(尊號)를 더할 것을 의논하니, 재신(宰臣) 및 태학(太學)의 모든 유생들은 번갈아 상소하여 금 나라 사신을 참(斬)하라고 간청하였고, 아이들은 어지러이 기와와 돌을 던져 사신을 쫒아 버렸다. 그들이 군사를 일으키게 된 이유가 대개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공이 이때 의주(義州)에 머물러 있는데, 무재(武宰) 이확(李廓) 역시 회답사(回答使)로 의주에 도착하였다. 금 나라 사신이 도망쳐 돌아가다가 두 사신(공(公) 즉 나덕헌과 이확(李廓))을 만나 말하기를,
“우리 왕자들이 글[書]을 보냈는데 귀국에서 받지 않는 것은 무슨 뜻이오?”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그 글에 무엇을 말하였소? 만약 존호를 올리는 일이라면 우리나라 군신(君臣)이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였을 것이오.” 하였다. 금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조선(朝鮮)은 명(明) 나라만 높일 줄 알았지 천명의 소재는 알지 못하오. 우리 한이 모든 달족(㺚族)을 항복시키고 강토를 널리 개척하였는데, 어찌하여 보위에 오르는 것이 불가하단 말이오?”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명 나라를 섬긴 지 2백여 년이라, 군신의 의리가 일월(日月)처럼 분명하오. 어찌하여 부질없는 말로 우리를 시험하오?” 하였다. 금 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사신들이 심양에 들어갔을 때 여러 왕자가 존호 더할 것을 의논하면 그를 좇지 않으려 한들 그럴 수 있겠소?” 하므로 공의 말이,
“내 비록 한의 뜰에 목이 달리는 한이 있어도 뜻을 굽히지 않겠소.” 하고 드디어 이공(李公 이확(李廓))과 함께 심양의 사관에 도착하였다. 용골대가 맹약을 저버렸다고 책망하면서 말하기를,
“주씨(朱氏)는 황각사(皇覺寺)의 일개 중[僧]이오.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거니, 어찌 오래 독차지할 수 있겠소? 우리 한은 성심으로 사람을 대접하고 싸움하면 반드시 승리하지만, 明나라는 각박하여 곧 망할 지경에 이르렀으되 조선은 그에게 복종하여 섬기니 좋은 계책이 아니오.”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비록 조그마하지만 의리에 어긋나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하오.” 하였다. 용골대가 말하기를,
“조선에서 우리가 명 나라를 침범한단 말을 듣고 명 나라에 청병(請兵)하여 우리의 빈 틈을 노리지만, 우리가 먼저 조선을 침범하겠소.” 하므로 공의 말이,
“명 나라를 침범한다는 계책을 우리는 실로 모르는 일이오. 어떻게 합세하여 친단 말이오? 이는 금 나라에서 먼저 맹약을 저버린 것이오.” 하였다. 얼마 뒤에 한이 교(郊)에 나가 참호(僭號)를 올리려 하는데, 포로로 역관이 된 정명수(鄭命壽)가 사신들에게 그를 가 보라고 청하여 공의 뜻을 떠 보았으나, 공은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4월 11일에 그들 수십 명의 기병(騎兵)이 와 말하기를,
“한이 축하를 받으려 하니 복장을 정제하고 기다리라.” 하였다. 공은,
“내가 죽을 곳을 얻었다.” 하고 곧 이공(李公)과 함께 동쪽을 향하여 사배(四拜)한 다음,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을 찢고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명수를 주면서 말하기를,
“우리를 위협하려면 속히 우리 목을 치라.” 하고 두 사람은 다시 머리를 풀어 함께 묶은 다음 서로 손을 마주 잡고 나란히 누웠다. 한이 또 다시 기병을 시켜 두 사람을 잡아오게 하여 남교(南郊)에 끌려가니, 이때 한은 이미 관온인성제(寬溫仁聖帝)의 존호를 받고, 국호는 대청(大淸), 연호는 숭덕(崇德)이라 하였다. 팔고산(八固山)의 모든 왕자(王子)와 장교(將校) 수천 명이 좌우로 나누어 나열하고 군사들의 위엄이 매우 삼엄한데, 공을 잡아다가 그 반열에 세웠다. 이때 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공의 팔과 다리를 잡고 거꾸로 끌어 머리와 수염이 거의 다 빠지고 호흡을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공의 나이 이때 60여 세인데도 오히려 힘으로 항거하기를 격투하듯 하여 허리를 조금도 요동하지 아니하며 불굴(不屈)의 뜻을 보였다. 부인(俘人 포로로 잡혀온 명 나라 사람을 가리킨다)들은 곁에서 그 광경을 보고 스스로 그 슬픔을 참지 못하면서 남몰래 땅에다 글씨를 써 공의 그 큰 절의를 가상히 여기었다. 한이 사람을 시켜 공을 유도하기를,
“축하에 참여하면 살 것이요, 축하에 참여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하니, 공이 성을 내며 큰소리로 말하기를,
“차라리 축하에 참여하지 않아 살아남지 못할지언정 축하에 참여하여 살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난타하는 매가 내려 그 피가 옷을 적시며 땅을 붉혔다. 부인(俘人)으로 그들의 장교가 된 자가 민망히 여겨 하는 말이,
“형제의 나라로서 사신이 한 번 절하는 것이 얼마나 의리를 해치기에 이 지경에 이르도록 몸을 생각지 않는가?”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군명(君命)이 있지 않으면 비록 죽더라도 감히 절할 수 없는 것이다.” 하니 부인이 ‘다야다야(多也多也)’라고 하였는데, 다야란 것은 곧 감탄하는 말이다. 한이 축하 받기를 끝내고 공을 관에 구금해 두었다가, 이튿날 한이 동교(東郊)로 나갈 때 또 두 사람을 잡아갔다. 용골대가 말하기를,
“오늘 만약 절하지 않으면 크게는 형을 받을 것이요, 작으면 구류를 당할 것이다.”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죽일 테면 죽이고 가둘 테면 가두라.” 하면서 큰소리로 꾸짖음을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또 구타하여 오른쪽 갈빗대를 부러뜨렸다. 부인 광녕총병(廣寧總兵)이 공이 거의 죽게 된 것을 보고 가만히 역관(譯官) 박인후(朴仁厚)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대대로 명나라 조정에 벼슬하면서 포로가 되기를 달게 여기니, 비록 죽지는 않았으나 사람이 아니다. 지금 사신들의 굴하지 않는 태도를 보니, 우리는 너무도 부끄러워 자신을 돌아보매 살고 싶지 않다.” 하였다. 구타가 중지되고 성찬(盛饌)을 먹이니, 공이 기절하였다가 깨어나 누워서 그 음식 그릇을 차버리므로 지켜보던 자들은 아연실색하였다. 한이 또다시 관에 구금해 두게 하였다가, 이튿날 대중을 모아 놓고 공을 죽이기로 의논하려 하는데, 한의 형의 아들 요퇴(要魋)가 간하기를,
“저들은 죽음을 영광으로 삼는 사람이라, 만약 그들을 죽인다면 우리에게는 사신을 죽였다는 악칭이 붙을 것이요, 저들에게는 덕의를 갖춘 절의가 붙게 될 것이니, 또한 타국의 웃음거리가 될까 염려됩니다.” 하므로, 한이 죽이지 않았다. 하루는 용골대가 공에게 한의 글[書]을 주고 귀국을 독촉하면서 그 글을 열어보지 못하게 하였다. 공의 말이,
“열어보는 것이 전례라 받을 수 없다.” 하니, 용골대가 협박하며 억지로 행장에 넣어 주고 백여 명의 기병을 시켜 통원보(通遠堡)까지 호송하고 돌아갔다. 공은 스스로 생각하건대, 필시 한의 글에 새 인(印)이 찍혔을 것인데 그대로 싸 가지고 갈 수도 없고 또한 버릴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백지(白紙)와 청포(靑布)를 넣은 상자에 끼워 넣어 말 한 필에 실어 놓고 보인(堡人)에게 말하기를,
“말이 병들고 행장이 무거우니 심양으로 도로 보냈다가 후일을 기다리게 하라.” 하고 즉시 군관을 시켜 조정에 장계를 올렸는데, 변상(邊上)에서 ‘공이 그들 조정의 축하에 참여하였다’는 거짓말이 나돌았다. 관찰사(觀察使) 홍공(洪公)이 갑자기 이 말을 듣고 상소하여 국경(國境)에서 참할 것을 청하였으며, 삼사(三司 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ㆍ홍문관(弘文館)) 및 성균관(成均館) 유생 조복양(趙復陽) 윤선거(尹宣擧) 역시 율(律)에 의해 처벌할 것을 청했는데, 당시 김상헌(金尙憲)이 이조 판서가 되어, 두 사람은 봉명사신으로 항의한 것이 매우 명백하여 참형을 받을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극력 주장해 말하므로 상이 공은 백마성(白馬城)으로, 이공(李公)은 선천(宣川)으로 각각 유배를 명하였다. 그러자 가도 도독(椵島都督) 심세괴(沈世魁)가 부인(俘人)을 인해 두 사람의 불굴(不屈)한 사실을 듣고 황조(皇朝 명나라 조정)에 주달하였는데, 거기에,
“역적 오랑캐의 협박에 조선(朝鮮) 신이 절의를 지켰다.” 하였다. 7월에 접반사(接伴使) 이필영(李必榮)이 심세괴가 올린 주본(奏本)을 얻어 아룀으로써 대간(臺諫)의 논란이 그치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간혹 심세괴가 황조를 속였다고 하니, 애석한 일이다. 사람들이 남의 선한 것을 들으려 하지 않고 공을 죽이고자 한 것이 이와 같다. 마부달(馬夫達)이 통원보에서 돌려보낸 한의 글을 가지고 와 사신이 축하에 참여하지 않고 글을 받지 않은 데 대해 처벌할 것을 청하자, 재상 최명길(崔鳴吉)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절을 굽히지 않고 항의하며 한의 글을 내던진 사실이 사람들의 이목에 분명히 남아 있으므로 심세괴가 황조에 주달하기에 이르렀고, 또 덕헌(德憲)의 장계가 이르렀을 때 조정에서 포상을 의논하였는데, 그릇된 의논이 갑자기 일어나 사명을 더럽힌 죄로 구형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세괴가 황조를 기만하였다고까지 말하니, 신은 우리나라가 황제에 대해 스스로 해명할 길이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고, 당시에 수행했던 역관 신계암(申繼黯) 등이 비변사(備邊司)에 호소하여 공의 원통함을 말하자, 9월에 상이 특명을 내려 공을 석방하였다. 몇 달 뒤 금나라 한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와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할 때, 공이 나주(羅州)에 있으면서 병이 극심하여 임금을 호종(扈從)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듬해 정월에 상이 한영(汗營)에 갔을 때 한이 묻기를,
“나모(羅某/나덕헌)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난번에 그처럼 굴하지 않더니, 지금 다시 만나볼 수 없겠는가?” 하였다. 이후부터 심양으로 들어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의 일을 더욱 자세히 알게 되었다. 승지(承旨) 홍명일(洪命一)이 볼모로 심양에 다녀와 하는 말이,
“포로가 된 한인(漢人)이 ‘두 사람이 적소에 있다는 말이 사실이냐’고 묻기에, 저들은 모두 스스로 죽지 못하고 사명을 더럽혔기 때문에 처벌하였노라고 하니, 한인들의 말이 ‘국경을 나간 사신이 죽임을 당하게 되면 죽고 죽이지 않으면 굴하지 않을 뿐인데, 그들이 사명을 더렵혔다는 것인가?’ 하면서 곧 스스로 자기 목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다만 이를 위해 스 스로 죽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고 하였다.” 하였다. 그리고 정랑(正郞) 이치(李穉)가 일찍이 심양 사람의 집 벽상에 두 분의 항절도(抗節圖)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고 열황제(烈皇帝)는 심세괴가 주달한 것으로 감군어사(監軍御史) 황손무(黃孫茂)를 보내어 칙명을 내려 포상하고 우리나라를 회유하려 하였는데, 가도가 이미 격파되므로 조정에 들리지 못하게 되었다. 오직 한평군(韓平君) 이경전(李慶全)만이 그 사실을 알아 이공(李公 이치(李穉))에게 자세히 써서 알리었다. 이로부터 공의 모함이 차차 벗어지게 되었고, 상도 가상히 여겨 삼도 통어사(三道統禦使)로 발탁하였다. 기묘년(1639, 인조 17)에 체임되고, 이듬해 정월에 죽었으니, 향년은 68세요, 무안현(務安縣) 부주산(浮珠山)에 안장하였다. 공에게는 두 분의 배위가 있으나 함양 오씨(咸陽吳氏)와 전의 이씨(全義李氏)로서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으며, 내외 증현손(曾玄孫) 몇 명이 있다. 공의 성품은 간묵(簡黙)하고 강직하며 몸가짐이 장엄하였다. 구차히 용납하기를 부끄러워하며, 언의(言議)는 높고 엄격하였다. 온갖 비방이 엉클어져 일어나되 조금도 숙이는 태도가 없으며, 일을 요량하여 움직일 적에는 마치 신(神)과 같았다. 용골대가 우리나라에 와 관에 머물고 있을 때, 하루는 용골대가 말을 달려 없어져 버리므로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공이 급히 병조 판서 김시양(金時讓)을 찾아가 보고, 지공자(支供者)로 하여금 빨리 동관왕묘(東關王廟)로 가 기다리게 하고 말하기를,
“이 오랑캐 놈이 필시 남몰래 남한산성을 정탐하려는 심산일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올 때 에는 반드시 동관왕묘에 들러 잠시 쉴 것이니, 우리가 먼저 동관왕묘에 나가 기다리다가 영접하게 되면, 저 오랑캐가 감히 우리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과연 공의 말과 같았고 용골대는 몹시 무안해 하였다. 공이 왕왕 이와 같이 기이한 계책을 내었다. 공이 죽은 지 몇 해 후에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이 등주(登州)로부터 북경(北京)에 이르러 어떤 사람이 공의 화상을 내보였는데, 매를 맞으면서도 절하지 않으며 피를 흘리는 모습이 완연히 어제와 같았다. 임공(林公)은 곧 그 사실을 일기(日記)에 기재하였는데, 그 후 40여 년 동안 공의 후손이 잔미하여 능히 표양(表揚)할 수 없었고, 또한 세대가 멀어져 잊어버리게 되었다. 숙종 10년 갑자(1684)에 개성 유수(開城留守) 이선(李選)이 임금의 명에 의해 상소하여 포증(褒贈)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말이 구구이 절실하였다. 그리하여 상이 대신(大臣)에게 물으니,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의논드리기를,
“나모(羅某)는 특출한 대절(大節)인데, 지난번에는 조정 의논이 그릇되어 지나친 처벌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증명(證明)을 추가한다면 인신(人臣)의 절의를 격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므로 상이 병조참판(兵曹參判)의 증직을 명하였다. 그러나 조야(朝野)의 기록에 그릇된 것이 속출하고, 전해들은 것이 멀어져 그의 충절과 과실이 착란됨으로써 작위를 내려는 은전은 겨우 아경(亞卿)에 그쳤고, 증시(贈諡)와 정려(旌閭)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의로운 충혼이 어두움 속에서 빛을 보지 못하였고 열사(烈士)들의 분개한 마음을 더한 지 1백 40여 년이 되었다. 금상(今上 정조를 가리킨다) 2년 무술(1778)에 내가 사신을 따라 북경(北京)에 들어가 건륭제(乾隆帝)의 명으로 지은 《전운시(全韻詩)》를 얻어 보았는데, 그 주(注)에,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가 국호를 세우고 하늘에 제사할 제 열국(列國)이 와서 축하하되, 조선 사신 나모(羅某/나덕헌)와 이모(李某/이확)가 유독 절하지 않아 좌우가 그를 죽이려 하니, 황제가 저들은 예의를 지켜 절하지 않는 것이라, 죽이는 것은 불가하다.’ 하여 곧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하였으니, 문황제는 바로 한(汗)이다. 공의 5대손 벽천(璧天)이 이 사실이 있음을 듣고 한편 슬퍼하고 한편 기뻐하면서, 기해년(1779, 정조 3)에 공의 유사(遺事)를 싸 가지고 와 진신(搢紳)들에게 슬피 호소하므로 상이 이를 듣고 특명으로 ‘충렬(忠烈)’이란 시호를 내림과 동시에 정문(旌門)을 내렸다. 아, 슬프도다! 위충(危忠)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빛났고, 쌓인 원한이 이로 말미암아 통쾌히 풀렸고, 공론이 이로 말미암아 정해졌고, 천륜이 이로 말미암아 밝게 드러났으니, 훌륭하고 아름다워 유감이 없다. 벽천이 내가 《전운시》를 볼 때에 함께 들었다 하여 전말의 기록을 청해왔다. 내 진실로 감히 입언(立言)으로 자처하지 못하고 그 가승(家乘)에서 대략 뽑아 일사장(逸事狀)을 만든다.
[주]황각사(皇覺寺) : 중국 안휘성(安徽城)에 있는 절[寺].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이 미천할 때 이 절의 중이 되었었는데, 명 태조가 즉위한 후 이 절을 용흥사(龍興寺)로 개칭하였다.
참고/ 나덕헌의 조선사신불굴의 정신을 기록한 고문헌으로는 “나구포(羅鷗浦 구포는 만갑(萬甲)의 호)의《병자록(丙子錄)》, 다른 서적에 산견(散見)하는 것으로는《택당집(澤堂集)》의 〈남한일기(南漢日記)〉ㆍ〈임장군일록(林將軍日錄)〉과《지천집(遲川集)》ㆍ《약천집(藥泉集)》ㆍ《하당록(荷堂錄)》ㆍ《지촌집(芝村集)》ㆍ《서계집(西溪集)》ㆍ《청일통지(淸一統志)》의 유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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